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먼 슈워츠코프 (문단 편집) == 일생 == 1934년 [[뉴저지]] 주 트렌튼에서 육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1956년 [[미국육군사관학교|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 미 육군 제101공수사단 187공수연대 2공수전투단 E중대에서 소대장과 부중대장직을 맡았다. 중위로 진급 후에는 독일 주둔 제6보병사단에서 소총소대장과 연락장교, 수색소대장을 역임했다. 대위 진급 후에는 고등군사반을 수료하고,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항공우주 기계공학과에서 미사일 공학을 전공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기계공학과에 교수요원으로 재직했다. 웨스트포인트에서는 원래 3년을 근무해야 했는데, 그는 전투를 경험하고 싶은 나머지 육사 근무 1년만에 베트남 근무를 자원했고, [[베트남 공화국 육군]](남베트남) 공수사단에 군사고문으로 배치되었다. 베트남에서 소령으로 진급한 그는 둑코 전투에서 영웅적 전공으로 은성훈장을 수훈했다. 이후 베트남군 공수부대와 장거리 수색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단일 작전에서 4차례의 총상을 입고도 의무후송을 거부하며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는 전공으로 다시 두번째 은성훈장과 퍼플하트를 수훈했다. 1년간의 베트남 파병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웨스트포인트에서 남은 근무기간 2년을 더 채우고,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을 졸업했다. 결혼 후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대대장직을 월남에서 수행하기를 희망하여 두 번째 베트남 파병을 지원했다. 주월 미 육군 제23보병사단 198보병여단 6보병1대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데, 당시 지뢰밭에 고립된 병사들을 구조하다 입은 부상과 전공으로 세 번째 은성훈장과 두 번째 퍼플하트를 수훈했다. 1970년 겨울 그는 걸을 수 없을 정도의 허리 통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병원에서 선천적 허리 이상이 반복된 공수훈련으로 악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수술과 재활훈련을 받았다. 이후 미 육군대학에 입학했다. 대령 진급 후 알래스카 주둔 미 육군 제172보병여단 부여단장을 거쳐 위싱턴 주 포트 루이스 주둔 미 육군 제9보병사단 1여단장을 맡았다. 준장 진급 후 하와이 주둔 미 태평양사령부에서 정책계획차장으로 근무했고, 독일에 주둔한 제8보병사단에서 부사단장을 지냈으며, 이후에는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인력관리국장을 지냈다. 1983년 소장 진급 후에는 육군 제24기계화보병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재직 중 [[그레나다 침공]]작전 편조부대인 제120연합합동군(CJTF-120) 사령부에 육군 선임고문으로 차출되어 작전에 참여했다. 작전 둘째 날부터는 CJTF-120 부사령관직을 맡았다. 그레나다 침공작전시 미 해병대 제22해병상륙부대(MAU)장인 해병 대령이 육군 레인저 병력의 해병대 헬기 이용을 거부하는가 하면, 작전에 참가한 육군 헬기들에 대한 급유 비용 부담 문제로 해군 상륙함에서 급유를 거부하는 등 전쟁터에서 관할구역을 따지는 혼란한 현실을 체험하고 후일 합동작전 교리를 완성했다. 그레나다 침공 작전 후 24사단장으로 복귀했다가 다시 합동참모본부에서 근무했다. 1986년 중장 진급 후에는 미 워싱턴 주 주둔 제1군단장을 거쳐 육군본부 작전계획참모부장으로 근무했다. 1988년 대장 진급과 동시에 미 중부사령관으로 부임, 재임 중 [[걸프 전쟁]]을 맞았고, [[이라크]]를 격퇴하기 위해 편성된 다국적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것이라는 전세계의 우려가 무색하게 불과 백 단위의 아군 사상자만 남긴 채 [[이라크군]]을 철저하게 격파하며 사실상 와해시키고, [[쿠웨이트]]를 해방시켰다. 그나마 그 아군 사상자들 중에서 반이 사고사 혹은 아군의 오사/오폭이었다(...). 다국적군의 작전명인 "사막의 폭풍(Desert Storm)"은 슈워츠코프 장군의 별명인 "폭풍의 노먼(Stormy Norman)"에서 따온 것이었다(그 외에 "곰(the Bear)"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파일:external/4.bp.blogspot.com/Norman+Schwarzkopf.jpg]] 걸프 전쟁 당시 작전 브리핑을 하는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 미국군의 100시간만의 승리를 만천하에 선포하는 너무나도 명료한 슈워츠코프의 브리핑은 가히 전설로 남았다. 이후 콜린 파월과 함께 원수직 영전을 고려받았으나 최종적으로는 육군참모총장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전역했다. 역시 정치계에서 영입하려는 시도들도 많았으나 모두 거절했으며, 회고록을 쓰거나 군사자문 등을 하며 조용히 지내다 2012년 겨울 [[플로리다]]의 [[탬파]]에서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해는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본인의 생전 공로를 생각하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충분하지만, 역시 장교였던 그의 아버지가 묻힌 곳이라는 점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웨스트포인트 묘지에 묻힌 이들 중 지명도가 있는 인물로는 [[조지 커스터]],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베트남전 당시 미국군 총사령관) 등이 있다. ~~미국군의 대표적인 패장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